아방–브로드캐스팅(1984년경)

윌리엄 카이젠(William Kaizen)1

 

프랑스의 TV 진행자 클로드 빌레르(Claude Villers)는 저녁 식사 시간에 방송되는 프로그램 제목이 왜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인지를 시청자들에게 설명해야 했다. 그날은 1984년 새해의 첫날로, 여전히 냉전 체제하에 있던 세상에 조지 오웰(George Orwell) 소설의 혼령이 불길하게 다가오던 때였다. 빌레르는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미국 및 유럽 방송사 간의 공동 위성 생방송이며, 따라서 두 대륙 사이를 오가며 방송이 전개된다는 사실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했다. 시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작자들은 뉴욕 시각으로 정오에 방송을 시작하기로 했는데, 그렇게 하면 샌프란시스코 시각으로는 아침 9시, 그리고 파리 시각으로는 저녁 6시에 방송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빌레르는 심지어 오웰조차도 TV의 이러한 전 세계적 영향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백남준은 예상했었다. 비록 빌레르가 ‘백남준‘이라는 이름이 유럽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미국 측 방송은 뉴욕의 한 스튜디오에서 조지 플림튼(George Plimpton)에 의해 진행되었고, 당시 백남준은 유럽보다 뉴욕에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플림튼은 백남준이 그 프로그램을 ‘글로벌 디스코’라 부르고 있다면서 오웰의 암울한 예언과 대조시켰는데, 이는 백남준의 이전 비디오 작품인 1974년의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를 언급한 것이다. 〈글로벌 그루브〉는 이미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된 적이 있고, 전 세계 갤러리들에서 전시되기는 했으나 사전 녹화된 작품이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백남준이 처음으로 조직한 국제 생방송 TV쇼로서, 쇼에 등장하는 출연자들은 실시간으로 상호작용 할 수 있었다. 플림튼은 스튜디오의 조작을 통해서 위성방송에 내재된 55초간의 전송 지연을 극복할 수 있었고, 빌레르와 동시에 새해를 축하하는 샴페인을 들 수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집에서 잔을 들고 참여했을 시청자들에게 “건배(À bon santé)”를 외쳤다.

1984년은 미국의 텔레비전 방송에서 중요한 한 해였다. 새로운 애플 매킨토시 컴퓨터 광고가 백남준의 방송이 나가기 몇 주 전에 전국적으로 전파를 탔다. 오웰을 향한 일종의 응답인 그 광고는 빅 브라더의 방송을 박살 내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멋지게 그려냈는데, 이는 개인 컴퓨터라는 더 큰 약속을 위해 수동적인 TV 시청에 속박된 시청자들을 상징적으로 해방시켰다. 그해 후반에는 MTV가 처음으로 뮤직비디오 어워즈를 개최하여, 80년대의 가장 대중적인 예술 형식인 뮤직비디오를 수상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격상시켰다. 1984년이 끝나갈 무렵, 첫 방송을 탄 코스비 쇼(The Cosby Show)는 흑인 중상류층 가정을 소재로 한 최초의 미국 TV 프로그램이었고, 이는 인종에 관한 전 국민의 시선을 변화시키는 데 한몫을 했다.

1984년은 백남준이 미국에 거주한 지 20년이 되던 해였다. 동시대 예술가였던 앤디 워홀(Andy Warhol)과 마찬가지로, 백남준의 성공은 아방가르드와 대중예술 사이를 오가는 그의 재치 있는 능력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현명하게도 경쟁이 그다지 심하지 않았던 분야를 선택했던 탓에 곧 언론으로부터 전자 예술(electronic art)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다. 1969년 보스턴 WGBH 방송사의 “아티스트–인–텔레비전(Artist–in–Television)” 작가로 선정된 이후, 그는 자신과 동료들의 비디오 작품을 담은 수많은 공영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방송작업 이외에도 그는 1960–70년에 걸쳐 꾸준하게 호평받은 전시 시리즈를 개최하였는데, 이는 1982년 휘트니 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의 회고전에서 완성을 이룬다. 이 유명한 회고전의 리뷰를 썼던 그레이스 글룩(Grace Glueck)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남준의 작품은 다수의 비디오 아티스트들의 작품들보다 다가가기 쉽다. 왜냐하면 그의 접근 방법이 거만하지 않고, 발랄하며, 심지어 재치 있기 때문이다.”2

백남준은 20세기 음악과 시각예술에서 아방가르드의 핵심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예술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대중음악을 사용했던 것처럼, 백남준의 작품에서 우리는 비틀즈에서부터 전통 민속 음악을 아우르는 대중음악의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그는 관람객들이 전자 대중 매체에 더욱 온전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그가 미국 도착 직후에 쓴 한 편지에서 자신이 비디오 신디사이저를 개발하는 작업 중에 있다고 하면서, 이것은 “누구나 각자 집에서 활용할 수 있고 […] 자신의 TV 수상기를 수동적인 여가 활동에서 능동적인 창작품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3 말했다.

WGBH에 머무는 동안 백남준과 일본인 전자공학자였던 슈야 아베(Shuya Abe)는 흑백 비디오카메라 이미지들을 반짝이는 고채도 색상의 진동 형태들로 변환시키는 신디사이저를 제작했다. 1969년 8월 1일, WGBH는 몽롱하고 혼란스럽게 리믹스된 비틀즈 음악을 배경으로 4시간 동안 신디사이저가 수행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조작을 보여주는 〈비디오 코뮨: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비틀즈(Video Commune: The Beatles from Beginning to End)〉를 방송했다. 이는 기존에 녹화되었던 비디오 실험 작품의 일부분과 합성되지 않은 일본 TV 광고가 생중계 속에 삽입되어, 마치 해외 방송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비디오 코뮨〉에 등장하는 더빙된 목소리는 각 가정에 신디사이저를 보급하는 대신 시청자들에게 그들의 TV 수상기를 조작해서 그들만의 고유한 리믹스를 창조하고 방송과 더욱더 교감할 수 있게 한다. 백남준은 대중들이 프로그램 전체를 시청하리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배경에 남아 간헐적으로 재생되고 응시하는 전자 벽지로서 〈비디오 코뮨〉을 디자인했다. 이러한 아방가르드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비디오 코뮨: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비틀즈〉는 비평가와 대중 모두의 사랑을 받았고, 이듬해 WGBH를 통해 재방송되기도 했다. 백남준은 아방가르드 포퓰리스트라는 자신의 전문분야를 발견한 것이다.

휘트니 미술관은 백남준에 “미국인” 아티스트의 지위를 부여했으나, 백남준은 철저한 세계주의자(globalist)였다. 그는 일련의 에세이들을 통해서 국경을 가로질러 사람들을 연결하는 방법으로 텔레비전과 관련된 기술을 사용하자고 오랫동안 주장해 왔다. 그는 1968년에 작성한 「종이 없는 사회를 위한 확장된 교육(Expanded Education for the Paperless Society)」에서 세계 곳곳의 뉴스 방송을 대학 내 공공장소에서 상영하고, 더불어 멀리 떨어진 타지역의 음악을 배울 수 있도록 비디오 기반의 교육을 제안했다.4

또한 백남준은 1974년에 쓴 「탈공업화 시대를 위한 미디어 계획」(Media Planning for the Post-Industrial Age)」이라는 글에서 다양한 유형의 정보가 “브로드밴드 통신 네트워크(broadband communication network)”를 통해 스트리밍이 가능한 21세기를 예상했었다. 그는 양방향의 상호작용성을 포함한 이 네트워크가 위성을 통해 전 세계에 도달하여 “전자 슈퍼하이웨이(electronic superhighway)”를 형성하고, 이것이 마침내 인류의 오랜 꿈이었던 양방향 비디오 대화를 현실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5 백남준은 매사추세츠의 숲에서 고립된 상태로 지내며 회의적인 글을 썼던 19세기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를 인용했다. “우리는 메인에서 텍사스에 이르는 전신(電信)을 구축하는 일에 매우 성급해 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메인과 텍사스에는 서로 소통할 만한 중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6

전 세계에 가족과 친구를 둔 떠돌이 이식자(transplant)로서 백남준은 소로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의 이름을 배우기도 전에 이미 배우 셜리 템플(Shirley Temple)의 이름을 배웠던 것을 기억했다. 그는 이러한 연결들이 여러 문화가 섞인(cross-cultural) 공감을 조성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탈공업화 시대를 위한 미디어 계획」에서 아시아인을 향해 미국 텔레비전이 보여준 비호의적인 이미지가 베트남에서 자행된 미군의 만행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그는 텔레비전이 미국 흑인들을 향해 보여주는 태도도 마찬가지로 비호의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상이한 공동체 출신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시간 화상회의를 제안했다. 그는 이것이 버스 통학제 프로그램과 함께 인종차별을 끝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다.

1984년 무렵 미국의 TV 생방송은 주로 뉴스나 스포츠에 한정되어 있었다. 1960년대 초에 이미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통신 위성이 발사되었지만, 국제적인 생방송 프로그램은 드문 일이었다. 1967년 비틀즈는 그들의 새로운 곡 「All You Need is Love」를 전 세계에 실황으로 연주했다. 1973년에는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콘서트 〈위성을 통해 하와이에서 전하는 알로하(Aloha from Hawaii via Satellite)〉가 전 세계 40개국의 10억 시청자들에게 생방송으로 중계되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백남준은 위성 전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77년에는 더글라스 데이비스(Douglas Davis),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와 함께 위성 생방송 프로그램을 구성하면서 《도큐멘타 6(Documenta 6)》에 참여하기도 했다. 1980년에 그는 키트 갤러웨이(Kit Galloway)와 셰리 라비노비츠(Sherry Rabinowitz)의 실외 설치작품인 〈공간 속의 구멍(Hole in Space)〉을 봤는데, 이 작품은 뉴욕과 로스앤젤레스를 위성 생중계로 연결하고, 그것을 각 장소에 설치된 커다란 비디오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특히 백남준은 서부에 사는 조부모가 동부에서 갓 태어난 손주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사건에 감동하였고, 비슷한 설치를 통해 뉴욕의 타임스퀘어와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을 항시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철의 장막을 넘어 사람들 사이를 연결하는 가능성을 그려보았다.

휘트니 미술관의 회고전을 위해 백남준은 보이스와의 위성 듀엣을 기획하려고 했었다. 이 기획이 실행되기 어렵게 되자, 그의 야망은 더 커져서 보이스와 존 케이지(John Cage),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가 최초로 함께 공연하도록 미국-유럽 간의 위성 생방송을 계획한다. 몇 달 사이에 백남준과 TV 프로듀서 캐롤 브란덴부르크(Carol Brandenburg)는 힘을 합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기획했고, 이는 뉴욕 WNET과 프랑스 FR3 방송국의 지원으로 방송되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백남준의 아방가르드한 동료들로만 채워진 것이 아니었다. 프로그램은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과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의 듀엣곡인 「이것이 그 사진이야(멋진 새들)(This is the Picture (Excellent Birds)」로 시작되었는데, 이 곡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위해 작곡된 것이었고, 이후에는 가브리엘의 멀티플래티넘 앨범인 〈So〉에 수록되었다. 팝 음악과 공연예술의 성공적인 융합으로 백남준으로부터 찬사를 들었던 앤더슨은 방송 후반에 재등장하여 강렬한 모놀로그를 선보였다. 그녀는 추락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던 이야기를 음을 몇 옥타브 낮춘 목소리로 전달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팝 음악이 주가 되었다. 오잉고 보잉고(Oingo Boingo)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실황으로 「정신 차려(1984년이야)(Wake Up(It’s 1984))」을 연주했고, 뉴욕에서는 톰슨 트윈(Thompson Twin)이 그들의 히트곡인 「날 안아줘(Hold Me Now)」를 립싱크로 공연했다. 프랑스에서는 여가수 사포(Sapho)가 「봉주르 미스터 오웰(Bonjour Mr. Orwell)」을 불렀고, 사전 녹화이긴 했지만 이브 몽탕(Yves Montand)의 춤과 노래도 방송되었다. 방송 중간에는 코미디 단편들이 간간이 배치되었는데, 그중에는 시청자들에게 감시당하는 평범한 일상인으로서의 빅 브라더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아방가르드를 대표한 것은 백남준의 오랜 친구들이었다. 샬롯 무어만(Charlotte Moorman)은 비디오 첼로를 연주했고,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은 비디오 특수 효과를 이용해 자기 자신과 춤을 추었다. 존 케이지는 타케히사 코수기(Takehisa Kosugi)와 야수나오 토네(Yasunao Tone)와 함께 뉴욕에서 즉흥 공연을 했고, 이것이 파리에서 있었던 보이스의 공연과 생방송으로 조합되었다.

방송의 하이라이트는 앨런 긴즈버그의 공연이었는데, 그는 아방가르드와 대중문화 사이를 오가며 일생을 보낸 사람이었다. 당시 긴즈버그는 하드코어 밴드인 ‘거짓 선지자들(False Prophets)’의 스티븐 테일러(Steven Taylor), 첼리스트이자 전자음악 뮤지션인 아서 러셀(Arthur Russell) 등을 포함한 젊은 뮤지션들과 함께 투어를 돌면서 자신의 커리어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테일러, 러셀, 그리고 피터 오를로프스키(Peter Orlovsky)와 함께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 출연한 긴즈버그는 「명상 록을 해라!(Do the Meditation Rock!)」라는 곡을 불렀는데, 이 즉흥곡의 가사는 냉전 종식을 생동감 있게 꿈꾼다. 마지막 후렴구에서 우리는 로큰롤 음악의 흥분으로 치닫는 긴즈버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반면 “관용! 관용! 침착하라. 그리고 인내와 관용을 배우라!”고 노래하는 가사는 이 장르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태도를 우리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하이라이트는 〈3막(Act III)〉 이라는 사전녹화 뮤직비디오로, 이 비디오는 딘 윙클러(Dean Winkler)와 존 샌본(John Sanborn)이 제작한 디지털 비디오 효과를 필립 글래스(Philip Glass)의 음악에 덧붙인 것이다. 이 비디오는 베르메르(Johannes Vermeer)의 현대판 회화처럼 보이는 실내 안으로 글래스의 딸인 줄리엣이 자기성찰적 방식으로 흡수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반짝이는 파스텔 색조 안에서 빠르게 빙글빙글 도는 기하학적 도형들은 시청자들을 그녀의 정신상태 속으로 끌어들이면서 화면을 가로지른다. 도형들은 글래스의 활기찬 배경음악에 맞추어 빠르게 변형되며, 마치 지구를 점령하기 위해 돌아온 엘 리시츠키(El Lissitzky)의 구성주의적 사각형들처럼 뉴욕 하늘 위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끝이 난다.

프랑스 측 방송은 보이스의 〈오웰 다리들(Orwell Legs)〉을 더 많이 보여주기 위해 글래스의 비디오를 생략했는데, 보이스의 딸 제시카가 그 작품의 모델이기도 했다. 〈21세기를 위한 바지(Trousers for the 21st Century)〉라고도 알려진 그녀의 바지는 한쪽 다리의 앞쪽과 다른 쪽 다리의 뒤편에 동그란 구멍이 나 있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스케치에서 보이스는 바지의 구멍들이 피부를 노출하거나 반사 패치로 덮일 수 있다고, 아니면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처럼 구멍 사이로 전구를 튀어나오게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한 바지가 “전 세계적 물질주의”에 대항하는 부조리한 몸짓이라고 기술했다. 이후에 여러 미술관이 한정판 청바지 형태로 〈오웰 다리들〉을 제작해 버렸지만, 실제 보이스의 스케치는 “스스로 만드시오!”라는 요청으로 끝난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호평을 받았는데 심지어는 한국에서도 백만 명의 사람들이 새벽 두 시까지 방송을 시청했다. 백남준은 방송의 성공을 기뻐했지만, 이 문화적 교류가 생각했던 것만큼 잘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자신의 성과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각 나라의 방송국들은 자국에 덜 알려진 인물을 접할 수 있는 계기를 시청자들에게 열어주기보다 자신들의 시청자들 입맛에 맞는 내용을 방송했고(유럽에서는 글래스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는 보이스가 생략되었다.), 프랑스 시청자들은 오웰이 누구인지도 잘 알지 못했다. 당시 오웰의 『1984』는 절판된 지 한참 되었기 때문에, 빌레르는 시청자들에게 왜 그 해가 특히 중요한지를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했다. 그러한 논평적인 개입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 대한 관심을 촉발했을지는 모르지만, 백남준은 그것이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1985년 라이브 에이드(Live Aid)의 대륙 간 위성 팝 음악 콘서트는 대략 20억 시청자를 사로잡았고, 아프리카의 기근 해결을 위해 1억 2천 5백만 달러를 모금하면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을 능가해 버렸다. 백남준은 라이브 에이드의 엄청난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공연자들 간 양방향 소통의 부재를 지적했다. 그는 1986년에 〈바이 바이 키플링(Bye Bye Kipling)〉을, 〈손에 손잡고(Wrap around the World)〉를 1988년에 완성했는데, 이 두 기획은 모두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 장면을 사용하여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의 올림픽 필름을 업데이트함으로써 라이브 에이드에 응답하려는 시도였다. 전자는 한·미·일 TV 방송국 간 합동 기획으로써 ‘서양(주로 미국과 유럽)’과 ‘동양(주로 한국과 일본)’ 사이의 문화 소통을 강화하고자 아시안 게임을 소재로 했다. 후자는 시야를 더 넓혀 브라질, 중국, 구소련을 포함했으며, 서울에서 열렸던 88년 하계올림픽을 다루었다. 비평가들은 〈바이 바이 키플링〉의 상호작용적 에피소드를 별로 좋게 평가하지 않았고, 이에 〈손에 손잡고〉에서 우리는 장거리 협동은 유지되지만, 상호작용성이 축소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백남준의 위성 방송은 장소 및 공연자의 다양성 측면에 있어서 여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도입부에서 플림튼은 1984년이 오웰의 1984와 전혀 다름을 지적한다. 백남준의 방송이 증명한 바와 같이, 텔레비전은 오웰이 상상했던 억압적인 힘이 아닌 “긍정적이고 상호작용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백남준의 방송은 이질적인 예술가들(아방가르드, 팝, 그리고 그 사이의 여러 지점들)이 서로의 물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생중계를 통해 외국의 시청자들에게 자신들의 협업을 보여줄 수 있도록 하는 야망 찬 시도였다. 비록 공연자들만이 비디오 신디사이저와 양방향 텔레커뮤니케이션에 접근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실험적인 국제적 댄스파티를 꿈꾼 백남준의 비전을 통해 이질적인 공동체들을 연결하고 냉전의 종식을 안내했다.

지금 우리는 비디오 조작 및 텔레커뮤니케이션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DIY 비디오의 확산은 긍정적인 영향만큼이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텔레커뮤니케이션 채널을 이용한 국제적 연결은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 않았다. 「강남 스타일」과 COVID-19의 흔적 속에서 백남준이 유튜브나 틱톡(TikTok) 상에 만들어 낼 법한 프로그램들을 우리는 단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분명히 그는 우리 시대의 빅 브라더에 대항하는 프로그램을 구상할 것이고, 긴즈버그가 간청했던 국제적인 관용을 전파하는 데 그것을 이용할 것이다.

영한번역: 신현주

윌리엄 카이젠(Ph. D) 『즉각성에 대항하여: 비디오 아트와 미디어 포퓰리즘(Against Immediacy: Video Art and Media Populism)』및 『모험: 성인을 위한(Adventure: for Adults)』의 저자이다. 그는 백남준의 컴퓨터 작업에 관한 글을 써왔으며, 미술사와 비디오 아트, 비디오 게임의 역사를 가르친다.

Grace Glueck, “Art: Nam June Paik has Show at Whitney.” The New York Times, May 7, 1983. Section C, 22.

We are in Open Circuits: Writings by Nam June Paik, Edited by John G. Hanhardt et al. MIT Press (Cambridge, 2019), 98.

같은 , 130–141.

같은 , 154–165.

Henry David Thoreau, A Week on the Concord and Merrimack Rivers; Walden; The Maine Woods; Cape Cod, Edited by Robert F. Sayer. The Library of America (1985), 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