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타제에 대하여: 샤머니즘의 관점에서 바라본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

신야 와타나베1

 

요셉 보이스와 백남준은 1961년 7월 5일 처음 만났다. 뒤셀도르프의 슈멜라 갤러리 앞, 제로(ZERO)그룹의 행위예술 도중이었다.2 3 백남준은 이후에 이들의 첫 만남을 기록한 사진을 두 사람의 일생에 걸친 협업을 기념하는 복합 예술작품 〈보이스 복스(Beuys Vox)〉(1961–1986, 보이스의 목소리)의4 전시 도록 표지에도 사용했다.

사실 보이스는 그보다 먼저 1959년 11월 13일 갤러리22에서 있었던 백남준의 첫 퍼포먼스 음악작품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 테이프 리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Hommage à John Cage: Music for Tape Recorder and Piano)〉의 공연을 방문했었다.5 여기서 보이스는 백남준이 피아노를 넘어뜨려 부수는 것을 보았다. 백남준은 보이스가 이 공연에서 샤머니즘의 영향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1년 반 후, 이 두 사람은 교류를 시작했고, 고대 유라시아의 기억을 간직한 샤머니즘에 대한 공통의 관심사를 공유하며 빠르게 친구가 되어갔다.

샤머니즘과 음악은 언제나 두 사람의 협업에서 중심에 있었다. 1962년 6월 16일, 백남준은 뒤셀도르프의 캄머슈필레(Kammerspiele Düsseldorf)에서 열린 두 번째 플럭서스 공연인 ‘음악에서의 네오–다다(NEO-DADA in der Musik)’에서 〈바이올린 솔로를 위한 독주(One for Violin Solo)〉를 전세계에 처음으로 선보였다. 당시 백남준이 천천히 바이올린을 들어올리자, 뒤셀도르프 시립 오케스트라의 악장이 “바이올린을 구하라!”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보이스와 콘라드 클라펙(Konrad Klapphek)이 “쉿, 콘서트를 방해하지 말라”며 그를 콘서트홀 밖으로 쫓아냈다.6 덕분에 백남준은 바이올린을 테이블에 내리치며 한 가지 음만을 만들어냈다.7

1963년 3월 11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백남준의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이 열렸다. 이 전시는 비디오 아트의 기원으로 평가되며 13대의 프리페어드 텔레비전(prepared TV)이 설치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백남준은 이 전시장 입구 위에 소의 머리를 걸어 한국의 샤머니즘을 간접적으로 언급했다.8 백남준은 어릴 적, 음력 10월 어느 날 오후 4시경 한 여성 무속인이 자신의 집에 와서 다음날 아침 8–9시가 될 때까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고 했다. 이 의식이 치러지는 동안 남자들은 모두 집밖으로 나가 있어야 했다. 무속인이 방문하기 며칠 전, 백남준의 어머니는 소의 머리를 통째로 넣고 국을 끓인 후, 머리뼈를 남겨 뒀다. 자정이 되어서 이 대감놀이 의식이 치러졌고, 소의 머리 뼈를 잡은 무당은 가장을 신으로 간주하고 춤을 췄다.9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전의 전시장에는 네 대의 프리페어드 피아노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중 한 대는 바닥에 놓여 있었고 덮개와 부품들이 뜯겨져 있었다. 관객들은 노출된 피아노의 현들을 직접 만지고 발로 건반을 칠 수도 있었다. 개막식 날 밤, 보이스는 전시장에 와서 망치로 이 피아노를 부쉈다.10 피아노를 엎어 놓고 바이올린을 망가뜨리는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본 보이스는11 진짜 망치(hammer)를 들고 와서 해머가 없는 피아노(hammerless piano)를 연주한 것이다.

이 둘에게 악기는 신체에 대한 은유였고 이를 부수는 것은 엑스타제(Ekstase)12의 샤머니즘적 행위, 즉 영혼의 해방이었다. 백남준은 마치 죽어가는 사람의 목을 베는 사무라이처럼 바이올린의 목을 부러뜨리고 그 몸에서 영혼을 해방시킨다. 한편, 보이스는 바닥에 눕혀져 있던 백남준의 피아노를 해체하는데, 이는 마치 물질적 현현(incarnation)인 몸에서 영혼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병증이 심각한 환자로부터 생명 유지 장치를 떼어내는 듯 보인다. 따라서 이 〈피아노 액션〉은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피아노를 부숴버린 보이스가 백남준에게 보내는 경의의 표현이었다.13

〈코요테 III(Coyote III)〉(1984)

1984년 두 사람의 일본 방문은 도쿄 소게츠 홀(Sogetsu Hall)에서 있었던 그들의 마지막 협업 작품 〈코요테 III〉로14 마무리되었다.15 백남준은 두 대의 피아노로 연주했던 이전의 콘서트 〈조지 마키우나스를 추모하며(In Memoriam George Maciunas)〉(1978)의16 변주곡을 만들고자 피아노 두 대를 주문했다. 리허설에서 보이스는 빨간색 뵈젠도르퍼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러나 실제 공연에서는 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대신 모스 부호 같은 것을 따라서 칠판에 ‘öö’를 쓰고 마이크에 대고 ’öö(외외)’ 소리를 냈다. 백남준은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의 〈서머타임〉, 쇼팽의 〈서곡〉, 코사쿠 야마다(Kosaku Yamada)의 〈아카톤보(Akatonbo, 빨간 잠자리)〉 등의 곡을 피아노로 연주했다. 그러다 갑자기 마이크로 피아노 건반을 맹렬하게 쳐서 마이크가 망가지기도 했다.

한편 보이스는 ‘코요테’라는 단어를 이 신호들 위에 썼다. 그는 그 부호를 코요테의 발걸음에 비유했고, 이는 곧 악보가 되었다. 그의 목소리 퍼포먼스는 코요테의 울부짖음이 되었고, 이 울부짖음에서 영감을 받은 백남준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와 타키 렌타로(Rentarō Taki)의 〈황성의 달(The Moon over the Ruined Castle)〉처럼 달과 관련된 곡을 즉흥적으로 연주했다.17 이 공연에 대해서 백남준은 후에 이렇게 회상했다. “관객들과 무대 위의 공연자는 눈 오는 밤 외로운 늑대의 ‘황야’를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의 시골에서 보낸 어린 시절, 가끔씩 외로운 늑대가 아이를 잡아먹으러 마을로 내려왔다. 겨울 밤 호롱불을 켠 어둑어둑한 방에서 늑대의 쓸쓸한 울음소리를 듣는 것은 일종의 시(poesie)를 만들어냈다. 보이스는 중앙아시아 스텝 지대의 시적인 감성을 정확히 재현해냈다.”18

보이스의 öö를 본 백남준은 “그가 눈 위에 찍힌 늑대의 발자국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보이스가 만들어내는 코요테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그는 달을 바라보는 늑대인간의 전설을 연상했고,19 달에 관한 유럽과 아시아의 노래들을 연주해 유라시아의 동과 서를 연결하고자 했다.

〈늑대의 걸음으로: 서울에서 부다페스트까지(A Pas de Loup: De Séoul à Budapest)〉(1990)

1986년 요셉 보이스가 세상을 떠난 후, 백남준은 1990년 7월 20일 자신의 쉰 여덟 번째 생일에 갤러리현대 뒷마당에서 퍼포먼스 〈늑대의 걸음으로: 서울에서 부다페스트까지〉를 선보였다. 7월 20일은 백남준에게 대단히 의미 있는 날이었다. 1964년 7월 20일은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von Stauffenberg)의 아돌프 히틀러 암살 기도가 실패로 돌아간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20 보이스는 이 날 피를 흘리며 소위 “히틀러 만세”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이 퍼포먼스는 플럭서스 페스티벌 〈행위/아지트–팝/데–콜라주/해프닝/이벤트/반(反)예술/로트리즘/총체 예술/리플럭서스: 새로운 예술을 위한 축제(Actions/Agit-Pop/De-Collage/Happening/Events/Antiart/L’autrisme/Art Total/Refluxus: Festival der neuen Kunst)〉에서 있었고, 백남준은 이 행사의 포스터를 만들었다. 그는 1965년 1월 미국에서 열린 첫 개인전의 초대장 뒷면에 보이스에게 “1964년 7월 20일의 순교자 당신(You MARTYR of July 20, 1964)”라고 썼다.21

이후 1985년 백남준은 〈7월 20일(July 20)〉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생일인 7월 20일과 1928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생일, 1944년 폰 슈타우펜베르크의 죽음, 1969년 존 에프 케네디가 추진한 달 착륙 사건을 동일선상에 놓았다.22 시간이 흐르면 그들의 생애주기는 무한에 이를 것이며, 업보(카르마)는 사라지고 환생의 속박을 벗어나게 된다.

1990년 있었던 공연의 제목은 〈백남준 + 무당 굿 + 요셉 보이스의 추모제(Nam June Paik + Shaman Exorcism Rite + Joseph Beuys’ Memorial Service)〉이다. 그리고 ‘우랄–알타이족의 꿈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무당의 굿’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23 백남준은 한국의 무속제의인 진오기 굿을 했다. 이 굿은 보통 망자의 영혼이 세속을 떠돌지 않게 하기 위해 그의 사후에 이뤄진다.24 백남준은 이 전시의 도록에 이렇게 썼다. “중세신학적 개념으로 미디엄(medium, 미디어 media)은 신과 소통하는 데 있어서의 매개(자) 혹은 수단을 의미한다. 굿(무당의 귀신을 쫓는 의식)의 기원은 몽고어 ‘올’(혼 그 자체)로 이는 미디어와 유사한 단어다.”25

무당들이 진오기 굿을 하는 동안 백남준은 그의 첫 개인전에서 보이스가 박살낸 피아노와 같이 바닥에 놓인 피아노에 다가갔다. 당시에 보이스는 망치로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이번 퍼포먼스에서 백남준은 피아노 뚜껑에 못을 박았고, 이를 보이스의 관으로 만들었다.26 그리고 나서 그는 이를 묻기 위해 삽으로 흙을 퍼서 피아노 위에 뿌렸다.27 그리고 그는 말의 털로 만든 모자를 쓴28  후, 위에 구멍이 뚫려있는 보이스의 모자 조각을 놓았다. 몽고의 샤머니즘에서 머리는 사람과 하늘을 연결해주는 거룩한 부분으로 숭배된다. 따라서 백남준은 모자의 꼭대기를 열어 보이스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 하늘로 갈 준비를 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모자의 뚫린 부분에 케첩을 더하여 이를 보이스의 중심 모티프인 피 흘리는 상처로 바꾸어 놓았다. 이후 그 위에 쌀을 던졌다. 피(케첩)와 정자(쌀)에 이어, 이 마술적 행위는 모자의 열린 부분을 아이를 출생하는 곳(질)으로 변화시켰고, 여기에 백남준은 꽃 몇 송이를 올려 놓았다. 이는 보이스의 〈우리는 그 장미 없이는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We Won’t Do It without the Rose, Because We Can No Longer Think)〉(1972)에 대한 경의의 표시이기도 하다. Fig. 1

백남준은 〈코요테 III〉에서 보이스의 사진이 나와 있는 병풍을 보이스의 법명인 ‘보이수(普夷寿)’와29 함께 전시했다.30 1984년 콘서트에서 보이스는 코요테의 발자국들을 칠판에 그렸고, 백남준은 이 발자국들을 서울에서부터 유라시아 유목민족들이 살던 지역 부다페스트까지 확장시켰다. 시베리아에서 시작해 한국에 남은 무속 의례를 통해, 백남준은 보이스의 영혼을 하늘로 돌려보냈다. 마치 〈우랄–알타이족의 꿈〉처럼 말이다.

〈독일 파빌리온: 마르코 폴로(Marco Polo)〉(1993)

1993년 백남준은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 파빌리온의 대표작가로 선정되었다. 독일이 통일된 후 열린 첫 번째 베니스비엔날레였다. 사람들은 동독과 서독에서 각각 한 작가씩 선발할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클라우스 부스만(Klaus Bußmann)은 머나먼 동쪽의 분단국가 출신 예술가인 백남준을 “명예 외국인 근로자(honorary foreign worker)”로 초대했다.31 백남준은 외국인으로서 다른 나라의 파빌리온을 대표한 첫 번째 작가가 되었다. 나치 시대에 만들어진 본관 파사드와 중앙 전시실을 쓴 한스 하케(Hans Haacke)와 함께, 백남준은 〈전자 초고속도로—베니스에서 울란바토르까지(Electronic Superhighway—From Venice to Ulan Bator)〉를 독일 파빌리온의 뒷마당에 전시했다.32 백남준은 몽골 텐트를 설치하고, 이 뒷마당을 고비 사막으로 표현했는데 요셉 보이스가 “고비사막은 없었다, 그 사막은 ‘녹색’이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33 “녹색들”이 많은 뒷마당의 장점을 살려, 백남준은 독일 녹색당의 창설자 보이스에 대한 경의를 표시했다.

“그 사막은 ‘녹색’이었다!”라고 했던 보이스의 생각을 바탕으로, 백남준은 고비 사막에서의 수많은 소통들에 대해 생각했다. 고대에 스텝지대 길은 ‘유라시아’의 동과 서를 잇는 고속도로였다. 이런 생각은 백남준의 〈전자 초고속도로〉(1974)로 이어졌는데, 이는 북미의 동쪽 해안과 서쪽 해안을 연결하는 광대역 통신망을 말한다. 그리고 1993년, 마침내 빌 클린턴과 앨 고어가 정보 초고속도로를 실현시켰다.34 백남준은 파빌리온에서 일곱 점의 작품, 〈로봇 가족(Family of Robot)〉, 즉 〈마르코 폴로(Marco Polo)〉, 〈징기스칸의 복권(Rehabilitation of Genghis Khan)〉, 〈스키타이 왕 단군(Tangun as Scythian King)〉, 〈아틸라, 훈족의 왕(Attila, the King of the Huns)〉,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캐서린 대제(Catherine the Great)〉, 〈요셉 보이스의 생명을 구해준 크림 반도의 타타르 인(Crimean Tatars who saved the life of Joseph Beuys)〉을 전시했다.

그는 마르코 폴로가 베이징에 올 수 있었고, 베니스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징기스칸의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덕분이었다고 썼다. 이 무역로는 매우 위험했지만 징기스칸이 통치했던 짧은 기간 동안에는 치안과 조세제도가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마르코 폴로가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마르코 폴로가 당시 중국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르네상스는 한참이나 늦춰졌을 것이다.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기스칸이나 아틸라 같은 동방에서 온 통치자들에 대한 유럽의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서양에서 그들의 평판이 좀 더 나아질 필요가 있다고 느낀 백남준은 〈징기스칸의 복권〉을 만들었다.

백남준은 또한 〈요셉 보이스의 생명을 구해준 크림 반도의 타타르인〉을 전시하는 이유에 대해서 크림 반도의 타타르가 독일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감사 인사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36 백남준은 독일 파빌리온의 뒷마당에 이 일곱 〈로봇 가족〉을 전시하여 동서 독일의 통일을 볼 수 없었던 요셉 보이스를 위해 멋진 추모식을 해줬고, 베니스를 울란바토르에 연결함으로써 우리를 ‘유라–시아’의 한식구로 만들었다.

영한번역: 손세희

*번역시, 저자가 대문자로 표기해 강조한 단어들은 작은따옴표 안에 넣어 표시하였다.

신야 와타나베(Shinya Watanabe) 독립 큐레이터와 영화 감독으로 활동하며, 도쿄 템플 대학(Tokyo Temple University)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논문 유라시아 찾아서: 요셉 보이스와 백남준의 일생에 걸친 협업(Searching for EUR-ASIA: Joseph Beuys and Nam June Paik’s Life Long Collaboration)」으로 베를린예술대학교(University of the Arts)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와타리 현대미술관(Watari Museum of Contemporary Art)에서 《백남준: 2020년에는 누가 웃을 것인가? + ? = ??(2016)전을 기획한 있다.

Riegel, Hans P. Beuys. Die Biographie (Berlin: Aufbau-Verlag, 2013), 161.

이때 보이스는 백남준에게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콘서트를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후에 콘서트는 플럭서스 페스티벌 〈페스톰 플럭소룸 플럭서스: 음악과 반음악, 기악극장(Festum Fluxorum Fluxus: Musik und Antimusik. Das Instrumentale Theater)〉이 열렸던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Kunstakademie Dusseldorf)에서 실현되었다. 이는 보이스의 행위예술(Action) 데뷔이기도 했다.

원화랑과 갤러리현대에서 16개의 에디션을 제작한 〈보이스 복스(Beuys Vox)〉는 1961년부터 보이스가 세상을 떠난 1986년까지 보이스와 백남준이 나눈 예술적 교류와 우정과 관련된 21점의 오브제(TV캐비넷, 조각품, 스크린, 사진, 리소그래프, 실크스크린, 옵셋인쇄물, 전시 도록, 녹음, 비디오테이프 등)로 구성된다. 여기에는 1978년 〈조지 마키우나스를 추모하며 요셉 보이스와 백남준의 피아노 듀엣(Piano Duet by J. Beuys and N.J. Paik In Memorium George Maciunas)〉와 〈보이스의 모자〉 사진 10장과 1984년 뒤셀도르프 콘라드피셔 갤러리에서 전시했던 〈슈메르츠라움(Schmerzraum)〉의 비디오 기록이 포함된다. 또한 21점의 오브제 중 13점에는 백남준의 서명이, 4점에는 요셉 보이스의 서명이 들어있다. 존 케이지의 서명이 있는 것도 1점 있다.

〈보이스 복스〉 전시 도록의 첫 머리에 백남준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내 인생의 한 가지 행운은 존 케이지(전문가보다 잔소리꾼으로 여겨졌지만)와 요셉 보이스(그는 여전히 뒤셀도르프의 특이한 은둔자였다)를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이미 스타였던 이 두 선배 거장들과 동료로서 대등한 관계로 어울릴 수 있었다.”

Nam June Paik, Beuys Vox 1961–86 (Seoul: Won Gallery, 1990), 2–4.

공연하기 직전에 백남준은새로운 세계 대전을 위한 타블로이드 전쟁광 1(Bildzeitung Kriegstreiber Nr. 1 für neuen Weltkrieg)”라고 적힌 팸플릿을 나눠줬다. Riegel, Hans P, Beuys. Die Biographie (Berlin: Aufbau-Verlag, 2013), 164. 팸플릿의 이 괴상한 제목은 백남준의 행위(action) 〈바이올린 독주〉를 목을 베어 할복 자살을 돕는 모습, ‘카이샤쿠’의 행위로 변화시킨다. 바이올린을 사무라이의 칼에 빗대며 백남준은 테이블 위에 바이올린을 내리쳐 목을 부러뜨린다. 카이샤쿠가 자살하려는 사람의 목을 베어 그가 편히 죽음을 맞이하게 해주듯, 바이올린의 목은 부러질 것이고, 연주는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다. 한 사람이 목을 베여 더 이상 살지 못하는 것처럼. 바이올린을 내리치는 순간, 극장의 불은 꺼지고 관객들은 공연과 바이올린의 생명이 서양 음악사를 결말짓는 단 하나의 음과 함께 끝났음을 감지했다.

백남준은 샤머니즘과 불교의 엑스타제(Ekstase) 대해 글을 있다. “Nachspiel zur Ausstellung, 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 (Wuppertal 1963)” [실험TV 전시회의 후주곡] in: V TRE Fluxus newspaper Nr.5, 1964.

Bauermeister, Mary, Manfred Leve, Nam J. Paik, and Peter M. Pickshaus, Nam June Paik (Köln: König, 2009), 103–104.

〈피아노 액션(Piano Aktion)〉에 대해 보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첫 콘서트(학교에서 연주한 베토벤과1960년 클레베의 전시 오프닝의 사티를 제외하고) 1963년 부퍼탈 파르나스 갤러리에서였다. 여느 피아노 연주자들처럼 어두운 회색 연미복에 검정넥타이를 맸고 모자는 쓰지 않았다. 나는 피아노 전체를 연주했다. 음만 연주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켤레의 낡은 신발들로, 피아노가 분리될 때까지 연주했다. 나의 목적은 해체적이지도 허무적이지도 않았다. ‘같은 종류의 것으로 치유한다’—similia similibus curantur—는 동종요법의 관점에서 보면, 주목적은 새로운 시작, 모든 전통적 예술 형식의 확장된 해석, 혹은 단순히 혁명적 행위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Tisdall, Caroline, and Joseph Beuys. Joseph Beuys (London: Thames and Hudson, 1979), 87.

1963년에 어느 인터뷰에서, 백남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피아노는 터부다. 부서져야 한다.” 백남준의 인터뷰, Gottfried Michael Koenig, ‘Die Fluxus Leute’, in Magnum, special issue Experimente. No. 47. (April 1963), 64; qtd. Decker-Phillips, Edith. Paik Video. Barrytown (N.Y: Barrytown, Ltd, 1998), 28.

1810 대화클라라(Clara)’에서, 프리드리히 셸링은 엑스타제(Ekstase)유한한 대상의 자아가 밖으로 나와 무한과 하나가 되는 이라고 설명한다. Davis, Bret W., Heidegger and the Will: On the Way to Gelassenheit (Evanston, Ill: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2007), 332.

중요한 것은 보이스가 거의 폭력적인 행위를치유 봤다는 것이다. 마치 살인 현장과 같이 욕조에 가라앉은 조각난 여성 마네킹을 보면서 보이스는 백남준이 입은 전쟁의 상처가 심각했음을 분명히 있었다. 부서진 마네킹은 백남준의 1962 〈원자폭탄 희생자(Atom Bomb Victim)〉를 떠올리게 한다. 방독면을 쓰고 제복을 입은 남성이 들것에원자폭탄 희생자 여성(반은 잔인한 상처로 변형되고 나머지 반은 성적 유희 대상이 ) 나른다. Paik, Nam J, Wulf Herzogenrath and Sabine M. Schmidt, Nam June Paik: Fluxus, Video (Bremen: Kunsthalle Bremen, 1999), 52. “Similia similibus curantur [같은 것들로 치유하다]”. 동종요법의 선구자 파라켈수스(Paracelsus) 인용하면서, 전쟁 상처로 깊이 고통 받았던 보이스는 백남준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했다.

퍼포먼스의 원래 제목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콘서트 퍼포먼스(백남준과 함께)(Concert Performance for Two Pianos (with Nam June Paik))〉였으나 나중에 〈코요테 III〉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소게츠 홀은 1964 5 〈소게츠 컨템포러리 시리즈: 백남준의 작품(Sogetsu Contemporary Series: Works of Nam June Paik) 동안, 백남준이 무대에서 대의 피아노 대를 부수었던 곳이다. 퍼포먼스에서 백남준은 일본의 연장인 카나(kanna) 피아노의 표면을 대패질했다. 백남준은 후에 이를 보이스의 추모제(Lebe Wohl unsere Beuys)에서 뚜껑을 제작하는 퍼포먼스에 사용했다. 1964 퍼포먼스는 오노 요코와 함께 했고 아세가와 겜페이가 리뷰를 썼다. 이후, 백남준은 미래에 그의 아내가 시게코 쿠보타를 만났다. Kubota, Shigeko, Chŏng-ho Nam, and Sonjun Ko, Watakushi No Ai, NamujunPaiku: My Love, Nam June Paik (Tokyo: Heibonsha, 2013), 69. [옮긴이국내 번역서도 최근 개정판이 출간됐다. (쿠보타 시게코, 남정호, 『나의 사랑, 백남준』(아르테, 2016))].

보이스가 1984531 와타리 갤러리 콘서트를 위해 칠판에 아홉 편의 곡을 다시 만들었다는 것은 염두에 둘 만하다. 제목은 〈연속체일곱 개의 콘셉트가 하나의 단위를 만든다: 음악과 반음악의 미래를 위하여(Continūūm—The Seven Concepts Form One Unit: For the Future of Music and Antimusic)(1984). 도쿄 소게츠 홀에서 열린 보이스와 백남준의 콘서트 〈코요테 III〉가 열리기 이틀 전이다.

후에 백남준은 〈달에서 울부짖음(月に吠える)(1992)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노란색과 하얀색 두 입체적 코요테들과 함께 소게츠에서 울부짖는 보이스의 이미지가 들어있다. 작품 제목은일본 현대 구어체 시의 아버지로 평가 받는 시인 하기와라 사쿠타료를 인용한 것이다. 그의 이름에 있는사쿠()’라는 말은 달에 반사된 햇빛이 지구에 닿지 않는 날, 오늘날로 말하면 초승달이 뜨는 날(New Moon)을 의미한다.

Nam June Paik, Beuys Vox, 37–38.

백남준은 마음 속으로 보이스가 종종 유라시아와 자유 국제대학(Free International University)[옮긴이창의적이고 총체적인 학문 연구를 위해 요셉 보이스가 세운 학교] 상징으로 사용했던 달토끼의 전설도 생각했다. 보이스한테 달토끼는 석가모니의 전생을 상징했다. 공연에서 보이스는 “Wehtim Bebenden, Webtbebend, Webendbindend”라는 문장이 들어있는 슈타이너의 음성시(sound poem) 선택했다. 문장은 더블유(w) (b) 시작하는 단어들로 되어 있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W) (B) 상응한다. 보탄(Wotan)[옮긴이고대 독일 신화에서 최고의 신이자 창조주] 오딘(Odin)[옮긴이—Wotan 다른 이름] 보다(Bodha)—부다(Buddha)처럼 같다.” 이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고 싶다면, 저자의 논문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https://opus4.kobv.de/opus4-udk/frontdoor/index/index/docId/1074

보이스는 1965년 그의 첫 책 『해프닝(Happenings)』에 자신의 허구의 이력 〈삶의 과정/작업과정(Life Course/Work Course)〉을 소개했다. 백남준은 자신의 생일 7 20일에 대해 음력, 약력, 독일의 파시즘, 소련의 독재와 연관시켜 다음과 같이 썼다. “1932 7 20, 히틀러에 반대하는 항쟁이 있던 날, 나는 한국의 서울에서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의 아들이자 내 할머니와 내 할아버지의 손자로 태어났다. 음력으로는 6 17(스탈린에 반대하는 항거가 일어난 날)이었다. 집에서는 한국의 관습을 따라 음력으로 6 17일에 생일을 지냈고 학교와 여권에서의 공식 생일은 7 20일이었다. 나는 이 날짜(7 20)를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독일 사람들이 히틀러에 더 강하게 저항했더라면 스탈린에 반대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처럼 6 17일뿐 아니라 두 생일 모두 국가 공휴일로 지정되어야 한다.” 백남준의 문장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의 아들이자 내 할머니와 내 할아버지의 손자는 사주추명(四柱推命)의 영향을 보여준다. 역경[옮긴이유교의 기본 경전인 오경의 하나로 본래는 주역으로 불림]에서 유래하고 음양오행이론에 기반한 사주 명리학은 해를 조부모, 달을 부모, 날을 본인, 시간을 자손으로 정의한다. 백남준은 720일 아시아()에서 백남준이 탄생한 것과 유럽()에서 보이스의 상징적인 죽음을 일치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유라시아 내 아시아()와 유럽()의 시차처럼.

Paik, Nam J, Sook-Kyung Lee, and Susanne Rennert, Nam June Paik (London: Tate, 2010), 130.

존 에프 케네디의 첫 번째 연설을 재생하는 〈K-456〉 퍼포먼스 시리즈에서, 백남준은 죽은 케네디가 마릴린 먼로의 다른 자아인 벌거벗은 샬롯 무어만과 만나게 했다.

Oh, Kwang Su, “Nam June Paik, Beuys and Shaman Exorcism Rite: A Search for the Original Form,” in Paik, Nam June, A Pas de Loup. de Séoul à Budapest (Seoul: Won Gallery/Hyundai Gallery, 1991), 63-65.

Horlyck, Charlotte, and Michael J. Pettid, Death, Mourning, and the Afterlife in Korea: Ancient to Contemporary Times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4), 145.

Paik, Nam June, A Pas de Loup. de Séoul à Budapest (Seoul: Won Gallery/Hyundai Gallery, 1991), 46.

피아노 뚜껑을 때리는 것은 케이지의 〈열여덟 봄의 아름다운 미망인 (The Wonderful Widow of Eighteen Springs)(1942) 나와 있는 것이었다.

이는 실행되지 않은 두 사람의 첫 협업작품 〈흙의 피아노(Earth Piano)(1962)에 대한 경의였을 것이다.

이 말 털모자는 백남준의 할아버지 백윤수가 팔았던 모자를 떠올리게 한다.

〈코요테 III〉콘서트 후,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다. 여기서 백남준은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백남준은 즉흥적으로보이스’로 읽힐 수도 있는 단어墓椅子(묘의자)’墓異州(묘이주)’를 만들어냈다. ‘()’라는 단어에 대해, 백남준은 글자 이()가 큰 활()을 가진 사람()을 뜻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고대 중국에서 중국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던화이(華夷)’에서 온동이(東夷)’의 개념은 한국의 민족적 배경들 중 하나를 형성했던 시베리아의 퉁구스족을 말한다.    

백남준은 이렇게 썼다. “예맥(고대 한민족) 늙은 늑대들의 무리라는 뜻인가? 위안의 역사에서, 통치자들은 스스로를 푸른 늑대들이라고 불렀다.” Paik, Nam June, A Pas de Loup. de Séoul à Budapest, 46.

하랄드 제만은 백남준을 “Geister Gastarbeiter[초대받은 영적 근로자(spiritual guest worker)]”라고 부른 번째 사람이었다. Bussmann, Klaus, Florian Matzner, and Nam J. Paik, Nam June Paik: Eine Data Base: La Biennale Di Venezia XLV, Esposizione Internazionale D’arte, 13.6.–10.10.1993, Padiglione Tedesco = German Pavilion = Deutscher Pavillon (Stuttgart: Edition Cantz, 1993), 10, 132.

1993년 독일 파빌리온은 제45회 베니스비엔날레의 최고의 파빌리온으로 선정되어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Bussmann, Klaus, Florian Matzner, and Nam J. Paik, Nam June Paik: Eine Data Base, 18.

백남준은 1993 전시도록 『데이터 베이스(eine DATA base)』에 작품 〈베니스 4—1993, 클린턴이 아이디어를 훔쳤다(VENICE IV—1993, Bill Clinton Stole My Idea)〉를 선보였다.

Nam June Paik, Beuys Vox, 50.

Bussmann, Klaus, Florian Matzner, and Nam J. Paik, Nam June Paik: Eine Data Base, 129.

요셉 보이스, 〈우리는 그 장미 없이는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72, 종이에 석판, 804 x 568 mm. ⓒ Joseph Beuys / BILD-KUNST, Bonn - SACK, Seoul,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