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타제에 대하여: 샤머니즘의 관점에서 바라본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
신야 와타나베1
요셉 보이스와 백남준은 1961년 7월 5일 처음 만났다. 뒤셀도르프의 슈멜라 갤러리 앞, 제로(ZERO)그룹의 행위예술 도중이었다.2 3 백남준은 이후에 이들의 첫 만남을 기록한 사진을 두 사람의 일생에 걸친 협업을 기념하는 복합 예술작품 〈보이스 복스(Beuys Vox)〉(1961–1986, 보이스의 목소리)의4 전시 도록 표지에도 사용했다.
사실 보이스는 그보다 먼저 1959년 11월 13일 갤러리22에서 있었던 백남준의 첫 퍼포먼스 음악작품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 테이프 리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Hommage à John Cage: Music for Tape Recorder and Piano)〉의 공연을 방문했었다.5 여기서 보이스는 백남준이 피아노를 넘어뜨려 부수는 것을 보았다. 백남준은 보이스가 이 공연에서 샤머니즘의 영향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1년 반 후, 이 두 사람은 교류를 시작했고, 고대 유라시아의 기억을 간직한 샤머니즘에 대한 공통의 관심사를 공유하며 빠르게 친구가 되어갔다.
샤머니즘과 음악은 언제나 두 사람의 협업에서 중심에 있었다. 1962년 6월 16일, 백남준은 뒤셀도르프의 캄머슈필레(Kammerspiele Düsseldorf)에서 열린 두 번째 플럭서스 공연인 ‘음악에서의 네오–다다(NEO-DADA in der Musik)’에서 〈바이올린 솔로를 위한 독주(One for Violin Solo)〉를 전세계에 처음으로 선보였다. 당시 백남준이 천천히 바이올린을 들어올리자, 뒤셀도르프 시립 오케스트라의 악장이 “바이올린을 구하라!”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보이스와 콘라드 클라펙(Konrad Klapphek)이 “쉿, 콘서트를 방해하지 말라”며 그를 콘서트홀 밖으로 쫓아냈다.6 덕분에 백남준은 바이올린을 테이블에 내리치며 한 가지 음만을 만들어냈다.7
1963년 3월 11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백남준의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이 열렸다. 이 전시는 비디오 아트의 기원으로 평가되며 13대의 프리페어드 텔레비전(prepared TV)이 설치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백남준은 이 전시장 입구 위에 소의 머리를 걸어 한국의 샤머니즘을 간접적으로 언급했다.8 백남준은 어릴 적, 음력 10월 어느 날 오후 4시경 한 여성 무속인이 자신의 집에 와서 다음날 아침 8–9시가 될 때까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고 했다. 이 의식이 치러지는 동안 남자들은 모두 집밖으로 나가 있어야 했다. 무속인이 방문하기 며칠 전, 백남준의 어머니는 소의 머리를 통째로 넣고 국을 끓인 후, 머리뼈를 남겨 뒀다. 자정이 되어서 이 대감놀이 의식이 치러졌고, 소의 머리 뼈를 잡은 무당은 가장을 신으로 간주하고 춤을 췄다.9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전의 전시장에는 네 대의 프리페어드 피아노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중 한 대는 바닥에 놓여 있었고 덮개와 부품들이 뜯겨져 있었다. 관객들은 노출된 피아노의 현들을 직접 만지고 발로 건반을 칠 수도 있었다. 개막식 날 밤, 보이스는 전시장에 와서 망치로 이 피아노를 부쉈다.10 피아노를 엎어 놓고 바이올린을 망가뜨리는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본 보이스는11 진짜 망치(hammer)를 들고 와서 해머가 없는 피아노(hammerless piano)를 연주한 것이다.
이 둘에게 악기는 신체에 대한 은유였고 이를 부수는 것은 엑스타제(Ekstase)12의 샤머니즘적 행위, 즉 영혼의 해방이었다. 백남준은 마치 죽어가는 사람의 목을 베는 사무라이처럼 바이올린의 목을 부러뜨리고 그 몸에서 영혼을 해방시킨다. 한편, 보이스는 바닥에 눕혀져 있던 백남준의 피아노를 해체하는데, 이는 마치 물질적 현현(incarnation)인 몸에서 영혼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병증이 심각한 환자로부터 생명 유지 장치를 떼어내는 듯 보인다. 따라서 이 〈피아노 액션〉은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피아노를 부숴버린 보이스가 백남준에게 보내는 경의의 표현이었다.13
〈코요테 III(Coyote III)〉(1984)
1984년 두 사람의 일본 방문은 도쿄 소게츠 홀(Sogetsu Hall)에서 있었던 그들의 마지막 협업 작품 〈코요테 III〉로14 마무리되었다.15 백남준은 두 대의 피아노로 연주했던 이전의 콘서트 〈조지 마키우나스를 추모하며(In Memoriam George Maciunas)〉(1978)의16 변주곡을 만들고자 피아노 두 대를 주문했다. 리허설에서 보이스는 빨간색 뵈젠도르퍼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러나 실제 공연에서는 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대신 모스 부호 같은 것을 따라서 칠판에 ‘öö’를 쓰고 마이크에 대고 ’öö(외외)’ 소리를 냈다. 백남준은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의 〈서머타임〉, 쇼팽의 〈서곡〉, 코사쿠 야마다(Kosaku Yamada)의 〈아카톤보(Akatonbo, 빨간 잠자리)〉 등의 곡을 피아노로 연주했다. 그러다 갑자기 마이크로 피아노 건반을 맹렬하게 쳐서 마이크가 망가지기도 했다.
한편 보이스는 ‘코요테’라는 단어를 이 신호들 위에 썼다. 그는 그 부호를 코요테의 발걸음에 비유했고, 이는 곧 악보가 되었다. 그의 목소리 퍼포먼스는 코요테의 울부짖음이 되었고, 이 울부짖음에서 영감을 받은 백남준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와 타키 렌타로(Rentarō Taki)의 〈황성의 달(The Moon over the Ruined Castle)〉처럼 달과 관련된 곡을 즉흥적으로 연주했다.17 이 공연에 대해서 백남준은 후에 이렇게 회상했다. “관객들과 무대 위의 공연자는 눈 오는 밤 외로운 늑대의 ‘황야’를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의 시골에서 보낸 어린 시절, 가끔씩 외로운 늑대가 아이를 잡아먹으러 마을로 내려왔다. 겨울 밤 호롱불을 켠 어둑어둑한 방에서 늑대의 쓸쓸한 울음소리를 듣는 것은 일종의 시(poesie)를 만들어냈다. 보이스는 중앙아시아 스텝 지대의 시적인 감성을 정확히 재현해냈다.”18
보이스의 öö를 본 백남준은 “그가 눈 위에 찍힌 늑대의 발자국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보이스가 만들어내는 코요테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그는 달을 바라보는 늑대인간의 전설을 연상했고,19 달에 관한 유럽과 아시아의 노래들을 연주해 유라시아의 동과 서를 연결하고자 했다.
〈늑대의 걸음으로: 서울에서 부다페스트까지(A Pas de Loup: De Séoul à Budapest)〉(1990)
1986년 요셉 보이스가 세상을 떠난 후, 백남준은 1990년 7월 20일 자신의 쉰 여덟 번째 생일에 갤러리현대 뒷마당에서 퍼포먼스 〈늑대의 걸음으로: 서울에서 부다페스트까지〉를 선보였다. 7월 20일은 백남준에게 대단히 의미 있는 날이었다. 1964년 7월 20일은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von Stauffenberg)의 아돌프 히틀러 암살 기도가 실패로 돌아간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20 보이스는 이 날 피를 흘리며 소위 “히틀러 만세”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이 퍼포먼스는 플럭서스 페스티벌 〈행위/아지트–팝/데–콜라주/해프닝/이벤트/반(反)예술/로트리즘/총체 예술/리플럭서스: 새로운 예술을 위한 축제(Actions/Agit-Pop/De-Collage/Happening/Events/Antiart/L’autrisme/Art Total/Refluxus: Festival der neuen Kunst)〉에서 있었고, 백남준은 이 행사의 포스터를 만들었다. 그는 1965년 1월 미국에서 열린 첫 개인전의 초대장 뒷면에 보이스에게 “1964년 7월 20일의 순교자 당신(You MARTYR of July 20, 1964)”라고 썼다.21
이후 1985년 백남준은 〈7월 20일(July 20)〉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생일인 7월 20일과 1928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생일, 1944년 폰 슈타우펜베르크의 죽음, 1969년 존 에프 케네디가 추진한 달 착륙 사건을 동일선상에 놓았다.22 시간이 흐르면 그들의 생애주기는 무한에 이를 것이며, 업보(카르마)는 사라지고 환생의 속박을 벗어나게 된다.
1990년 있었던 공연의 제목은 〈백남준 + 무당 굿 + 요셉 보이스의 추모제(Nam June Paik + Shaman Exorcism Rite + Joseph Beuys’ Memorial Service)〉이다. 그리고 ‘우랄–알타이족의 꿈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무당의 굿’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23 백남준은 한국의 무속제의인 진오기 굿을 했다. 이 굿은 보통 망자의 영혼이 세속을 떠돌지 않게 하기 위해 그의 사후에 이뤄진다.24 백남준은 이 전시의 도록에 이렇게 썼다. “중세신학적 개념으로 미디엄(medium, 미디어 media)은 신과 소통하는 데 있어서의 매개(자) 혹은 수단을 의미한다. 굿(무당의 귀신을 쫓는 의식)의 기원은 몽고어 ‘올’(혼 그 자체)로 이는 미디어와 유사한 단어다.”25
무당들이 진오기 굿을 하는 동안 백남준은 그의 첫 개인전에서 보이스가 박살낸 피아노와 같이 바닥에 놓인 피아노에 다가갔다. 당시에 보이스는 망치로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이번 퍼포먼스에서 백남준은 피아노 뚜껑에 못을 박았고, 이를 보이스의 관으로 만들었다.26 그리고 나서 그는 이를 묻기 위해 삽으로 흙을 퍼서 피아노 위에 뿌렸다.27 그리고 그는 말의 털로 만든 모자를 쓴28 후, 위에 구멍이 뚫려있는 보이스의 모자 조각을 놓았다. 몽고의 샤머니즘에서 머리는 사람과 하늘을 연결해주는 거룩한 부분으로 숭배된다. 따라서 백남준은 모자의 꼭대기를 열어 보이스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 하늘로 갈 준비를 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모자의 뚫린 부분에 케첩을 더하여 이를 보이스의 중심 모티프인 피 흘리는 상처로 바꾸어 놓았다. 이후 그 위에 쌀을 던졌다. 피(케첩)와 정자(쌀)에 이어, 이 마술적 행위는 모자의 열린 부분을 아이를 출생하는 곳(질)으로 변화시켰고, 여기에 백남준은 꽃 몇 송이를 올려 놓았다. 이는 보이스의 〈우리는 그 장미 없이는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We Won’t Do It without the Rose, Because We Can No Longer Think)〉(1972)에 대한 경의의 표시이기도 하다. Fig. 1
백남준은 〈코요테 III〉에서 보이스의 사진이 나와 있는 병풍을 보이스의 법명인 ‘보이수(普夷寿)’와29 함께 전시했다.30 1984년 콘서트에서 보이스는 코요테의 발자국들을 칠판에 그렸고, 백남준은 이 발자국들을 서울에서부터 유라시아 유목민족들이 살던 지역 부다페스트까지 확장시켰다. 시베리아에서 시작해 한국에 남은 무속 의례를 통해, 백남준은 보이스의 영혼을 하늘로 돌려보냈다. 마치 〈우랄–알타이족의 꿈〉처럼 말이다.
〈독일 파빌리온: 마르코 폴로(Marco Polo)〉(1993)
1993년 백남준은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 파빌리온의 대표작가로 선정되었다. 독일이 통일된 후 열린 첫 번째 베니스비엔날레였다. 사람들은 동독과 서독에서 각각 한 작가씩 선발할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클라우스 부스만(Klaus Bußmann)은 머나먼 동쪽의 분단국가 출신 예술가인 백남준을 “명예 외국인 근로자(honorary foreign worker)”로 초대했다.31 백남준은 외국인으로서 다른 나라의 파빌리온을 대표한 첫 번째 작가가 되었다. 나치 시대에 만들어진 본관 파사드와 중앙 전시실을 쓴 한스 하케(Hans Haacke)와 함께, 백남준은 〈전자 초고속도로—베니스에서 울란바토르까지(Electronic Superhighway—From Venice to Ulan Bator)〉를 독일 파빌리온의 뒷마당에 전시했다.32 백남준은 몽골 텐트를 설치하고, 이 뒷마당을 고비 사막으로 표현했는데 요셉 보이스가 “고비사막은 없었다, 그 사막은 ‘녹색’이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33 “녹색들”이 많은 뒷마당의 장점을 살려, 백남준은 독일 녹색당의 창설자 보이스에 대한 경의를 표시했다.
“그 사막은 ‘녹색’이었다!”라고 했던 보이스의 생각을 바탕으로, 백남준은 고비 사막에서의 수많은 소통들에 대해 생각했다. 고대에 스텝지대 길은 ‘유라시아’의 동과 서를 잇는 고속도로였다. 이런 생각은 백남준의 〈전자 초고속도로〉(1974)로 이어졌는데, 이는 북미의 동쪽 해안과 서쪽 해안을 연결하는 광대역 통신망을 말한다. 그리고 1993년, 마침내 빌 클린턴과 앨 고어가 정보 초고속도로를 실현시켰다.34 백남준은 파빌리온에서 일곱 점의 작품, 〈로봇 가족(Family of Robot)〉, 즉 〈마르코 폴로(Marco Polo)〉, 〈징기스칸의 복권(Rehabilitation of Genghis Khan)〉, 〈스키타이 왕 단군(Tangun as Scythian King)〉, 〈아틸라, 훈족의 왕(Attila, the King of the Huns)〉,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캐서린 대제(Catherine the Great)〉, 〈요셉 보이스의 생명을 구해준 크림 반도의 타타르 인(Crimean Tatars who saved the life of Joseph Beuys)〉을 전시했다.
그는 마르코 폴로가 베이징에 올 수 있었고, 베니스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징기스칸의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덕분이었다고 썼다. 이 무역로는 매우 위험했지만 징기스칸이 통치했던 짧은 기간 동안에는 치안과 조세제도가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마르코 폴로가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마르코 폴로가 당시 중국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르네상스는 한참이나 늦춰졌을 것이다.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기스칸이나 아틸라 같은 동방에서 온 통치자들에 대한 유럽의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서양에서 그들의 평판이 좀 더 나아질 필요가 있다고 느낀 백남준은 〈징기스칸의 복권〉을 만들었다.
백남준은 또한 〈요셉 보이스의 생명을 구해준 크림 반도의 타타르인〉을 전시하는 이유에 대해서 크림 반도의 타타르가 독일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감사 인사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36 백남준은 독일 파빌리온의 뒷마당에 이 일곱 〈로봇 가족〉을 전시하여 동서 독일의 통일을 볼 수 없었던 요셉 보이스를 위해 멋진 추모식을 해줬고, 베니스를 울란바토르에 연결함으로써 우리를 ‘유라–시아’의 한식구로 만들었다.
영한번역: 손세희
*번역시, 저자가 대문자로 표기해 강조한 단어들은 작은따옴표 안에 넣어 표시하였다.